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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꿈꾸게 하는 건 기쁨이 아니다.

페어럴 2025. 5. 2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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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꿈꾸게 하는 건 슬픔이었다.

 

 

어릴 적, 우리는 종종 묻곤 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대답은 언제나 반짝였다. 우주비행사, 발레리나, 화가, 소방관. 꿈이라는 단어는 아직 고통을 몰랐던 아이들에게 그 자체로 빛나는 단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몸에 스며들고, 현실이 기대를 눌러앉기 시작할 즈음 우리는 깨닫는다. 꿈은 늘 기쁨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 꿈은 결핍과 상실, 슬픔의 자궁 속에서 태어난다.

 

기쁨은 충만하다. 넘친다. 더 바랄 게 없다. 기쁨 속에서는 멈추고 싶어진다. 지금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기쁨은 그 자체로 충분하고 완결적이며, 욕망을 멈추게 만든다. 하지만 슬픔은 다르다. 슬픔은 빈틈을 남긴다. 허기진 마음, 놓쳐버린 것, 가지고 싶었던 것들의 실루엣을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그 빈틈을 채우기 위해 꿈을 꾼다. 슬픔은 “이게 아니야”라고 말하고, 꿈은 “그렇다면 어떤 세상이 가능할까”를 묻는다. 상실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상상력은 새로운 삶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혁명은 배부른 사람들이 시작하지 않는다. 문학은 웃음보다 울음에서 길어 올려진다. 예술은 넘침보다는 부족에서 피어난다. 역사를 바꾸는 모든 상상은 불편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 그 질문의 뿌리는 늘 슬픔이었다.

 

불의, 억압, 상실, 외로움, 부정당한 존재로부터 오는 슬픔. 인간은 그 슬픔을 견디기 위해, 그 슬픔에 눌리지 않기 위해 꿈을 꾼다. 꿈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최후의 저항이다. 그것은 생존의 기술이자, 존재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다. 인간은 울부짖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는다. 슬픔은 우리를 주저앉히지만, 동시에 손끝을 뻗게 한다. 그 뻗는 방향이 바로 꿈이다.

 

우리는 종종 슬픔을 약함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슬픔은 무너뜨리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다. 슬픔은 우리를 가라앉히지만, 동시에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감정의 동굴이며, 우리는 그 동굴 안에서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진지한 꿈, 오래 지속되는 욕망, 멈추지 않는 창조는 대부분 슬픔을 껴안은 채 태어난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무언가가 끝났을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향해 걸어 나갈 수 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희망은 더 단단하고 깊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진짜로 변화시키는 건 축하의 박수가 아니라 무거운 침묵 속의 눈물이다. 그 눈물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방향이 된다. 기쁨은 순간이고, 슬픔은 기억된다. 기쁨은 멈추게 만들고, 슬픔은 걷게 만든다. 우리는 기쁠 때보다 슬플 때 더 멀리 본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크게 꾼다.

 

그래서 결국 사람을 진짜 꿈꾸게 만드는 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껴안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슬픔은 언젠가, 새로운 가능성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시 돌아온다. ‘꿈’이라는 이름으로. 그 꿈은 현실을 밀쳐내는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을 이겨내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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